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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표기의 다양성: 언어 풍부함의 척도

Cid_tw 2016. 3. 19. 23:35

언어 표기의 다양성: 언어의 풍부함의 척도

...서양 고전이나 소설에 나오는 복잡하고 생소한 고유명사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도전이다. 우리의 경우 특히 그것이 장애가 되는 것은 고유명사임을 알리는 표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영불어에서처럼 대문자로 시작된다든가 하는 지표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일단 멈추게 된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라는 표기 체계가 있어 외국어나 외래어를 가타가나로 표기해서 한결 편리하다.

물론 우리도 외국어의 고유명사나 외래어를 특정하기 위한 방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필자에 따라 혹은 출판사에 따라 방점을 찍거나 밑줄을 그어 표지로 삼은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시도는 이어지지 않고 대체로 소멸한 것 같다. 밑줄이나 방점이 시선을 끌기도 하지만 그게 도리어 장애로 여겨진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불어나 일어와 비교할 때 우리에게 외국어의 고유명사나 외래어를 나타내는 표지가 없다는 것은 불편하고 속독에서 하나의 장애 요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런 점을 극복할 방책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략)

 

에세이 주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외국어로 된 고유명사를 한국어에 맞게 바꾸는 과정을 갖고 외국어 고유명사를 나타내는 표기를 추가하자는 주장은 사고 범위 내에서 벗어난 생각 같다. 기본적으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인 한글은 주자(鑄字) 당시에도 인간의 발음 기관 모양에서 차용해 온 것이기 때문에 알파벳에 기반하고 같은 표기에 여러 가지 발음이 존재하는 서양어들과는 달리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발음하기에 매우 쉬운 축에 속한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소설인 <부활> 의 경우 러시아 작가가 러시아어로 쓴 소설이고 소설의 배경도 러시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인명,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가 필수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표기에 여러 가지 발음을 용인하는 서양어 특성 상 여러 가지 읽는 방법이 존재한다. 작 중 인물에는 Любовь(류보프) 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Любовь. 사전에 따른 알파벳 발음 기호는 [Lyubov] 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엄청난 교육을 받지 않는 이상 사전에 표기된 발음 그대로 발음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개개인이 가진 음색이나 구강 구조 등이 발음을 왜곡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결과적으로 두고 봤을 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단어를 지칭하기 위한 의도로 발화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 특성은 아랍어의 외국어 표기에서도 두드러지게 발생하고, 실제로 영어권 뉴스들의 아랍어-영어 표기를 살펴보면 같은 명사나 동사에 대한 표기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느 것을 지칭하는 지 인식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일본어와 같이 외래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필요하다고 고집하는 입장에게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참 어렵다. 하지만 간단하다. 일본어를 예로 들었지만 이미 일본어를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에서 오류가 존재한다. 일본어 표기 문자는 일본어 고유 단어를 적는 히라가나(ひらがな)와 외래어 표기를 할 때 사용되는 카타카나(カタカナ)가 있다. 실제로 일본어로 쓰여진 글을 보면 히라가나와 카타카나가 혼용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어가 모국어거나 일본어를 배워 문해 능력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어떤 의미이고 어떤 단어의 외래 표기인지 금방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말 좋은 것일까? 162개의 가나들을 외워도 모든 발음을 표기하지 못해 이제는 카타카나 투성이인 글들을 일본인이라고 해서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아마 외래어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기성 세대들은 그런 글을 읽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반면에 한국어는? 발음 나는 그대로 적을 수 있는 특성 덕분에 처음 듣는 단어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확한 발음에 엇비슷하게 적을 수 있다. 나이가 있는 어른들이 해외여행을 가서 간단한 영어 문장을 한국어 발음으로 옮겨 그 문장을 외우는 것 보다 한국어로 표기된 발음을 외워 영어를 배운 적이 없어도 영어를 사용하는 화자와 소통할 수 있게 해 준다. 영어를 배운 사람들이라도 어려운 영어 발음을 외울 때 한글을 사용해 그 발음을 외우는 일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에 갖고 있던 우리말의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잘 보존하고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래어의 변별성 있는 표기를 위해 지금의 체계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을 한다는 것은 그저 변별성을 명분으로 표기의 다양화를 해치는 일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 이 포스트는 네이버 열린연단의 <변별성 있는 표기를 위하여>를 읽고 쓴 소감문입니다.